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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백 (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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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상백은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 체육계와 학계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서울대학교 교수, 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농구 선수, 체육 이론가, 행정가로 활동하며 한국 체육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역사학, 사회학 연구를 통해 학문 발전에 기여했으며, 1964년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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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백 (1904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백무일재 이상백 교수
한글이상백
한자李相佰
가타카나이・상베크
히라가나り・そうはく
로마자 표기Yi Sang-Baek
상백(想白), 백무일재(百無一齋)
인물 정보
출생일1904년 8월 6일
출생지대한제국 경상북도 대구부 중구 서문로 12번지
사망일1966년 4월 14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직업사학자 겸 사회학자 및 체육인, 대학 교수 겸 교육인
거주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신장184cm
종교유교(성리학)
경력
소속전직 문교부 편수관 (1948년 8월 21일~1949년 7월 20일)
대학고려대학교 교수
학력
학력서울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가족 관계
이시우
김신자
배우자서자영(사별), 김정희(재혼)
자녀이학희(장남)
이영희(양차남)
이경희(딸)
형제이상정(형)
이상화(형)
이상오(아우)
친인척이동진(할아버지)
이일우(큰아버지)
한문이(형수)
권기옥(형수)
서온순(형수)
서연희(제수)
박창암(조카사위)
이열희(5촌 조카)
최남선(사돈)
박중양(사돈)
웹사이트
웹사이트두피디아 이상백

2. 대표 경력

3. 일생

이상백은 일제강점기 중반 농구 선수이자, 해방 이후 각종 올림픽 대회의 선수단 대표와 대표단장을 역임하였다. 사학자이자 사회학자로도 활동하였고, 각종 사회단체, 문교부 고시출제위원, 중앙공무원교육원 명예교수 등을 역임했다. 진단학회, 연경학회,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독립운동가 이상정, 시인 겸 작가 이상화의 동생이며, 수렵가 겸 문필가 이상오의 형이고,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준장 박창암의 처숙부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경상북도 대구 출신이다.

1944년 여운형이 결성한 지하 독립 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에 참여했고, 광복 직후 여운형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1945년 9월 조선 체육 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에 취임, 체육단체 조직 및 체육경기 활성화에 힘썼다. 같은 해 12월 조선 체육회 상무이사를 지냈다.

1946년 경성대학교(서울대학교의 전신)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 설립을 주도하여 주임교수가 되었고, 사망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1955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4년 대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과 국제 올림픽 위원회 종신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63년 건국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선수단장으로 참가했다.

만년에 서울대학교에 동아문화연구소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을 역임했다. 장서가로, 수집한 책들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기증하여 상백문고(想白文庫)를 마련하였다.

1966년 4월 1일 쓰러져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 심장경색증심장질환으로 4월 18일 사망하였다.

3. 1. 생애 초반

1904년 8월 6일, 경상북도 대구(현재의 대구광역시)에서 아버지 이시우(李時雨), 어머니 김신자(金慎子) 사이에서 4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이상정(李相定, 1897년생)은 독립운동가, 이상화(李相和)는 민족시인, 동생 이상오(李相旿)는 저술가였다. 이상백은 이듬해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이일우(李一雨)에게서 자랐다.

이상백의 집안은 대구의 명문가이자 부호였다. 조부 이동진(李東珍)은 사재를 털어 우현서루를 설립, 남녀와 신분을 불문하고 학생들을 받아들여 한학을 가르쳤다. 이후 교사를 초빙하여 수학, 역사, 국어, 영어, 일본어 등 신식 학문을 가르쳤다.

이상백은 우현서루에서 한학을 배운 후 1915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소년 시절부터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있어, 일본에서 구입한 야구 용품으로 야구를 즐겼다. 고등보통학교 시절 장신 투수로 속구를 던졌고, 테니스도 학교 대표로 대회에 출전했다.

3. 1. 1. 출생과 가계

1904년 8월 6일 경상북도 대구(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 12번지에서 아버지 이시우(李時雨)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신자(金愼子) 사이에서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첫째 형 이상정은 독립 운동가이며, 둘째 형 이상화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족 시인, 작가이며 넷째 동생 이상오는 정통 수렵가이자 바둑 유단자이다.

이상백의 집안은 대구의 명문가이자 대 부잣집이었으나, 아버지 이시우는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큰아버지인 이일우(李一雨)의 자손들은 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이상백 형제의 할아버지 이동진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대구 중구에 신식 학교인 우현서루를 열어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나중에는 교사를 초빙하여 수학, 역사, 국어, 영어, 일본어 등 신식 학문을 가르쳤다. 할아버지 이동진의 뒤를 이어 큰아버지 이일우가 우현학교의 일을 맡아보았다.

훗날 2000년대 초반, 그의 생전 큰아버지인 이일우의 후손들은 대학 학장 3명, 교수 10명, 의사 30명, 장군 2명, 언론·출판분야 11명을 배출하였다.[3] 또한 사촌 이상악은 작가이자 그의 친구인 육당 최남선과 사돈이 되었고, 다른 자손들 중에는 '박작대기' 박중양 집안과도 인척 관계를 형성하였다.[3] 이상백은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이일우에게 양육되었다.

이상백은 우현서루에서 한학을 배웠다.

3. 1. 2. 학창 시절

1910년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15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1919년 3·1 만세 운동의 여파로 대구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에 참여하려다가 실패하고 잠시 은신하였다. 그 뒤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제일고등학원(早稻田第一高等學院)을 거쳐, 1923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에 입학했다.

소년 시절부터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많아, 일본에서 구입한 야구 용품으로 야구를 즐겼다. 고등보통학교 시절에는 장신 투수로서 속구를 던졌을 뿐만 아니라, 테니스도 잘하여 학교 대표로 대회에 출전할 정도였다.

3. 2. 청년기 활동

이상백은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제1고등학원(현재 와세다대학 고등학원·중학부)을 거쳐 1923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에 입학했다. 와세다 제1고등학원에서 아사노 노부아키(浅野延秋)가 시작한 농구 동호회에 참가하며 농구와 인연을 맺었다. 대학 재학 중부터 경기 이론·경기 규칙 확립에 관심을 가졌고, 1931년 대일본체육협회의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1935년에는 대일본체육협회 전무이사에 취임했다. 또한, 동경올림픽대회 초청 위원·준비 위원을 역임하고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스웨덴, 폴란드 등을 방문했다.

3. 2. 1. 일본 유학 시절

1923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에 입학했다. 와세다 대학 제1고등학원 시절 아사노 노부아키(浅野延秋)가 시작한 농구 동호회에 참여하면서 농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구부에 소속되었으나, 농구 동호회에도 참가했다.

180cm가 넘는 큰 키를 바탕으로 농구부에 정식으로 참가하여 센터를 맡았다. 1924년에는 일본 대학농구연맹 결성에 참여하고, 와세다 대학 농구팀 대표로 활동하며 미국 원정 경기에서 여러 번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메이지 신궁 경기대회(제1회 메이지 신궁 경기대회)에서 도쿄 대표로 출전하여 우승했다.

1927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1930년까지 동양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 이와 함께 와세다 대학 동양사상연구소 연구원으로도 활동했다. 일본 유학 중에도 자주 귀국하여 국내 학자들과 교류했으며, 진단학회 결성 준비에 참여하고 회원이 되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모교 농구부 감독을 맡아 농구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후지타 코우지로(冨田幸次郎)(농구부 주장 후지타 타케로(冨田毅郎)의 아버지)를 설득하여 미국 원정 경비를 마련하고, 일본 학생 농구팀 최초로 미국 본토 원정을 이끌었다. 제임스 네이스미스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농구 이론을 연구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각 대학 OB들을 모아 "피닉스 클럽팀"을 조직했다.

1930년에는 농구 지도서 『지도 농구의 이론과 실제』를 출판하여 일본 농구 기술 향상에 기여했다. 이 책은 사진과 설명 그림을 많이 활용하여 당시 일본 농구계의 바이블적인 존재가 되었다. 또한, 대일본농구협회 설립을 주도하고 규칙 위원, 편찬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일본 농구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는 와세다 대학 외국 연구원으로 일본 점령하의 중국 베이징에 파견되어 동양학을 연구했다.

3. 2. 2. 체육 활동: 농구 발전에 기여

이상백은 1920년 아사노 노부아키(浅野延秋)가 시작한 와세다 제1고등학원의 "농구 동호회"에 참가하면서 농구와 인연을 맺었다. 키가 180cm가 넘는 장신이었던 그는, 1923년 와세다대학에서 정식으로 발족한 농구부에 합류하여 센터로 활약했다. 1924년 처음 개최된 메이지 신궁 경기대회(제1회 메이지 신궁 경기대회)에서는 도쿄 대표로 출전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1924년, 전일본학생농구연합(현재 관동대학 농구연맹의 전신) 결성에 참여했고, 1927년 대학 졸업 후에는 모교 농구부 감독을 맡아 농구 강화를 위해 미국 원정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는 제임스 네이스미스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농구 이론을 연구했다.

1930년에는 농구 지도서 『지도 농구의 이론과 실제』를 출판하여 일본 농구 기술 향상에 기여했다. 같은 해 대일본농구협회 설립을 주도하고 규칙 위원, 편찬 위원 등을 역임하며 일본 농구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일본 선수단 임원으로 참가하여 농구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 운동을 전개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농구 심판원을 맡아, 일본인 최초의 국제 농구 심판원으로 기록되었다.

3. 2. 3. 일제강점기 후반: 민족의식을 지키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스포츠계에도 여러 가지 영향이 나타났다. 대일본체육협회 이사였던 이상백은 극동선수권경기대회가 해산된 후, 일본 주도의 종합 경기 대회 개최(동아경기대회)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농구 단독으로 동양선수권대회 개최를 추진했다.

1939년 7월부터 1941년까지 와세다 대학 외국 연구원 자격으로 일본 점령하의 중국 베이징에서 동양학을 연구했다. 이 시기 이상백은 점령지에서의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스포츠의 유용성을 강조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0년 창씨개명 때, 이상백은 끝까지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 대일본농구협회 창립 10주년 기념식에서 공로자로 표창받았다.

1944년 10월, 여운형이 결성한 지하 독립 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에 참여했다.

3. 3. 광복 직후 활동

1945년 광복 직후 여운형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 해산 후에는 특별히 정치적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대두되었을 때에는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3. 3. 1. 건국준비위원회 참여와 체육계 재건

광복 직후 여운형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참고로 여운형은 해방 후 재건된 조선체육회(후의 대한체육회) 회장에 취임했다). 건국준비위원회 해산 후에는 특별히 정치적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1945년 9월 조선 체육 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에 취임, 본격적인 체육단체 조직 및 체육경기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같은 해 12월 조선 체육회 상무이사가 되었다. 그 뒤 IOC 가입을 목표로 활동하였으며, 반탁 시위에 휘말리지 않고 IOC 가입 문제를 논의하였다. 1946년 초 IOC 가입 대책 위원회를 조직하고 부위원장에 위촉되었다.

3. 3. 2. 대한민국 체육 발전의 기틀을 다지다

1945년 9월 조선 체육 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에 취임하고, 본격적인 체육 단체 조직 및 체육 경기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같은 해 12월 조선 체육회 상무이사가 되었다. 그 뒤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가입을 목표로 활동하였으며, 1946년 초 IOC 가입 대책 위원회를 조직하고 부위원장에 위촉되었다.

1946년에는 조선체육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1948년 단독 정부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대두되었을 때 그는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1951년에는 대한체육회 부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아시아경기연맹 집행위원을 거쳐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일제강점기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비롯,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회의 대표로 참석한 경력이 인정되어, 1948년 런던 올림픽, 1952년 헬싱키 올림픽,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대한민국 대표 선수단 총감독, 단장, 아시아 경기 대회 대표 선수단 단장 등으로 여러 번 선수단을 이끌고 해외에 원정하였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등에도 선수단장으로 파견되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한국 선수단의 단장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1년에는 대한체육회 부회장에 취임했고,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총감독으로 한국 대표 선수단을 이끌었다. 또한, 대한올림픽위원회(KOC)의 아시아경기연맹(AGF) 가입을 달성했고, 1954년 마닐라 아시아 경기 대회에서는 조직위원장을 역임했다.

이후에도 1956년 멜버른 올림픽,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대표 선수단 단장 등으로 선수단을 이끌고 해외 원정을 다녔다. 1964년, 대한체육회장·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모두 1966년까지)을 역임했다. 같은 해,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국 출신 IOC 위원으로는 이기붕에 이어 두 번째).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도 선수단장으로 파견되었다.

3. 4. 학술 연구 및 사회 활동

1945년(1946년이라고도 함)에 경성대학교(서울대학교의 전신)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 설립을 주도하여 주임교수가 되었고, 사망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1955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가 공무원 채용 시험 출제 위원으로 국사·문학 분야를 담당하였고, 중앙공무원훈련원 고문 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교수 자격 심사 위원회 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3·1 문화상 심의 위원회 위원, 동방 문화 연구소 위원 등 많은 공직·사회 단체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961년 6월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 조직 재건 국민 운동 본부 중앙 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작가이자 수필가로도 활동하였다. 여행을 좋아하여 젊은 시절부터 국내의 명승고적과 세계 각지를 여행한 기행문을 남겼다. 고고 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서울대학교 박물관장, 국보·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 위원, 국립 박물관 심의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3. 4. 1. 사학 연구: 조선 건국사 연구의 선구자

일제강점기 진단학회 학보에 서자 차별 문제를 다룬 '서얼차대(庶孽差待)의 연원에 대한 일문제'를 기고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 전기와 건국 초기 분야를 연구하였다.[1] 그는 '삼봉인물고(三峰人物考)', '이조 태조의 사전개혁운동(私田改革運動)과 건국 후의 실적', '위화도회군고(威化島回軍考)',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에 취하여', '고려말 이조초에 있어서의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운동(田制改革運動)과 그 실적' 등 고려 말, 조선 건국, 조선 전기 분야의 정치, 사회적 현상을 연구, 분석하였다.

1910년까지도 고려 우왕과 고려 창왕이 신돈의 아들, 손자라는 주장의 허구성을 논증하고, 조선 건국 세력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인 것처럼 유포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에 취하여'를 발표하였다. 조선 전기 서자 차별 문제 외에 과부 재가 금지법인 '재가금지습속(再嫁禁止習俗)의 유래에 대한 연구' 등의 논저도 발표하였다. 그밖에 진단학회 편찬 《한국사-근세전기편-》, 《한국사-근세후기편-》 편집을 담당하였다.

'삼봉인물고(三峰人物考)'를 발표한 후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린 것은 정도전의 잘못도 있지만 정도전의 정적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비난받고 부정적인 시각만 강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주로 고대사, 중세사, 상고사를 연구하는 타 학자들과 달리 조선 왕조사 연구에 집중하여 조선 건국과 조선 초기 분야 연구에 업적을 남겨 1963년 건국훈장과 문화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받았다.

고려 말기부터 조선 건국기 및 전기에 걸친 정치·사회 연구를 수행하였다. 주요 논문은 “삼봉인물고”, “이조 태조의 사전개혁운동과 건국 후의 실적”, “위화도 회군고”, “우창비왕설에 취하여”, “고려말 이조초에 있어서의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운동과 그 실적”, “재가금지습속의 유래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 문화사 연구 논고』, 『이조 건국의 연구』 등이 있다.

논문 “우창비왕설에 대하여”는 고려 말기 우왕과 창왕이 왕족 혈통이 아니라는 주장(조선 왕조 『고려사』에는 고려 말 권력을 휘두른 승려 신돈의 자손이라고 기록)의 허구성을 논증하고, 조선 왕조 건국 세력이 유포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삼봉인물고”에서는 정도전(삼봉은 그의 호)이 “역적”으로 규정된 것은 그의 잘못도 있지만, 정적에 의해 일방적인 비난을 받고 부정적인 면만 강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3. 4. 2. 사회학 연구: 한국 사회학의 기틀을 다지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사회학과의 개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국내 최초로 사회학과를 설립하고, 대학 강의와 교양지 및 학술지를 통해 사회학을 보급하였다. 1957년 한국사회학회 창립에 참여하여 회장을 2기 역임하였다.

대학에서 국사, 근세사 외에도 사회학사, 한국사회론 등을 강의하였으며, 《질서와 진보》, 《중간계급의 성격》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사회학 연구의 기초 자료로서 통계조사와 설문을 채택, 통계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사회학 연구와 보급을 위해 로베르토 미헬스의 《정치 사회학》 등 외국 사회학 서적을 한글 번역서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회학은 주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고전 사회학 이론을 국내에 도입, 한국 사회에 적용하고 이해하려 노력하였다. 사회 조사에도 관심을 기울여 농촌, 도시, 사회 계층 등에 관한 여러 조사 연구와 설문을 하였다. 황해안의 여러 섬들에 관한 조사보고서인 《서해도서 (西海島嶼)》를 집필하였다. 한국 사회사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3. 4. 3. 기타 사회 활동

이상백은 사학자이자 수필가로도 활동했으며, 각종 사회단체, 문교부 고시출제위원, 중앙공무원교육원 명예교수 등을 역임했다. 일제강점기 중반 농구 선수였으며, 각종 올림픽 대회의 선수단 대표와 대표단장을 역임하였다. 진단학회, 연경학회,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내무부의 고등고시 출제위원으로 국사, 문학 분야 출제를 담당하였고, 중앙공무원훈련원 고문 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 학술원 출범 후 학술원 회원으로 초빙되었으며, 연경학회(燕京學會) 회원, 동방문화 연구소 위원 등으로도 위촉되었다.

대한민국 문교부 대학교수자격 심사위원회 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3·1 문화상 심의위원회 위원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여행을 좋아하여 국내 명승고적지와 세계 5대양 6대주를 수없이 돌아다닌 여행가였으며, 기행문 등을 남기기도 했다.

1957년 한국사회학회 창립에 참여하여 1대와 2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 6월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정에서 조직한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고고 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서울대학교 박물관장, 국보·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 위원, 국립 박물관 심의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3. 5. 생애 후반

1964년에 대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과 국제 올림픽 위원회 종신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63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선수단장으로 파견되었다.

만년에 이상백은 국학과 동양학 연구를 목적으로 서울대학교에 동아문화연구소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을 역임했다. 그는 연구 계획을 수립하고 학술 세미나 개최를 기획하고 준비하였다. 그는 장서가로, 젊은 시절부터 헌책방과 각종 서점을 돌며 희귀한 한중고활자본을 비롯한 진귀한 서적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였다. 만년에 자신이 수집한 책들 모두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기증하여 상백문고(想白文庫)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1966년 4월 1일 갑자기 쓰러져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병세는 심장경색증을 비롯한 심장질환이었고, 4월 18일 아침 8시경 서울대학교 대학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4. 사후

장례식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한국사회학회, 진단학회,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 등 5개 단체가 주관한 연합장으로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가족 묘역에 안장되었다. 1967년 1주기에 세워진 묘비문은 국문학자 이희승이 짓고, 글씨는 이기우(李基雨)가 썼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고, 1966년 8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삼등 욱일중수장을 추서받았다. 1970년 12월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주요 저서로 《조선 문화사 연구 논고》, 《이조 건국의 연구》 등이 있다. 사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이상백배 쟁탈 한일 학생 농구 경기대회가 해마다 개최되고 있으며, 아시안게임 최우수선수에게는 이상백배(杯)가 특별 수여되고 있다.

1976년 이상백의 10주기를 기념하여 와세다대학 농구팀을 한국에 초청, 대회가 열렸으며, 1978년부터 한일 학생 농구 대항전인 이상백배 쟁탈 한일 학생 농구 경기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2019년 3월 31일 일본 농구 명예의 전당은 첫 헌액자로 이상백(李相佰, 명의는 이상백(李想白))을 오모리 헤이조(大森兵蔵)와 함께 선출하였다.

5. 가족 및 친척 관계

이상백의 가계도
직계관계이름 및 비고
할아버지이동진
큰아버지이일우[3]
사촌이상악
5촌 조카이석희
당조카며느리안귀홍 (경북대 병원장 안두홍의 누나, 영남의료원장을 역임한 안종철의 고모)
5촌 조카이탁희 (3남 3녀)
재종손이재철
재종손이재주 (군법무관 손준성의 어머니)
재종손이재란
재종손서박영철 (대봉정형외과 원장)
재종손이재구 (대구 성서병원 원장)
재종손이재혁 (성서이비인후과 원장)
재종손서이동수 (대영산부인과 원장)
재종손서김재연 (경산신경외과 원장)
사촌
사촌이상길
5촌 조카이합희 (출판인, 동명사 전 부사장 역임)
5촌 조카이엽희
당조카며느리? (박기성 에스닷(대구문구센터) 사장의 누이)
5촌 조카이섭희 (이재우(의사, 부산 고신대학교 의대 교수, 고신대 내과과장))
5촌 조카딸이무희
조카사위최한웅 (서울대학교 의대 교수)
5촌 조카딸이수희
조카사위이경형 (서울대학교 공대 교수)
사촌 누나이숙경
사촌 매부윤홍열 (1893년 ~ 1947년 2월 19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과 대구시보사 사장 역임 - 윤필오의 아들
5촌 조카윤영주
윤성기
허귀진 ( 대구시장 허억의 딸)
윤덕주 (1921년 6월 23일 - 2005년 7월 8일[5]), 농구선수, 대한체육회 부회장·명예회장 역임
당조카사위서정귀 (1919년 ~ 1974년), 4대·5대 국회의원, 재무부 차관(1960년), 호남정유사 사장 역임
사촌이상무
5촌 조카이열희 (1924년 12월 18일 ~ 2012년 8월 9일)
당조카며느리박부남 (1932년 ~ )
아버지이시우(李時雨, ? ~ 1907년)
어머니김신자(金愼子), 김해 김씨 (金海 金氏)
이상정 (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 독립운동가. 아호(雅號)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형수한문이 (1895년 ~ 1941년)
형수권기옥 (1901년 1월 11일 ~ 1988년 4월 19일, 이상정(李相定)의 부인, 여성 비행사.)
이상화 (1901년 5월 9일 ~ 1943년 4월 25일, 작가, 민족 시인. 아호(雅號)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형수서온순(徐溫順)
아우이상오(李相旿, 1905년 ~ 1969년, 수렵가, 바둑인. 아호(雅號)는 모남(慕南). 경상북도 대구 우현고등보통학교 졸업 및 일본 호세이 대학교 법정학과 학사.)
제수서연희(徐蓮姬)
조카사위박창암 (朴蒼巖, 1923년 5월 15일 ~ 2003년 11월 10일, 군인, 정치가. 이상오(李相旿)의 사위. 아호(雅號)는 만주(滿洲), 허주(虛舟), 농부(農夫). 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 육군 준장 전역.)
첫째 부인서자영(徐慈英, 1898년 ~ 1942년), 2년 연상.
슬하아들: 이학희
딸: 이경희
둘째 부인김정희(金貞姬, 1913년 ~ ?), 9년 연하, 개신교 신자, 1951년 재혼.
사돈최남선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
사돈박중양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
사돈허억 (1889년 6월 1일 ~ 1957년) - 대구시장



이상백은 경주 이씨 가문의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으며, 그의 형제들은 모두 일본 유학을 경험하고 각 분야에서 이름을 남겼다. 첫째 형 이상정은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대한독립군에 참여했고(후에 중화민국 국민혁명군에 편입), 그의 아내 중 한 명인 권기옥은 여성 비행가로 알려져 있다. 둘째 형 이상화는 민족 시인으로 유명하다. 막내 이상오는 법정대학 졸업 후 사냥꾼으로 알려진 인물로, 사냥과 야생 동물에 관한 저술가가 되었다.

이상백의 가문은 명문가였으며, 인척으로는 최남선박중양이 있다. 초기 여자 농구 선수인 윤덕주 (1921년 - 2005년)는 그의 사촌 누이의 딸이다.

6. 학력

7. 상훈 경력

보관문화훈장

참조

[1] 웹사이트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 https://encykorea.ak[...] 2019-10-10
[2] 텍스트
[3] 뉴스 특집- 상화의 큰 집 사람들 http://www.lifemaeil[...] 주간매일 2002-11-27
[4] 서적 출판인 정진숙 을유문화사 2007
[5] 뉴스 윤덕주 농구협회 명예회장 별세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05-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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